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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4. 19:54



<건너편>
98p.
   이수가 공부를 그만둔 계기는 '도화'였다. 이수는 도화가 '어디 가자' 할 때 죄책감 없이 나서고, 친구들이 '놀자' 할 때 돈 걱정 없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갈등에 속했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반면 자기는 뭐랄까,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성인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 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한 시절과 작별하는 기분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뒤도 안 돌아보기' 위해 이를 악물며 1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117p.
   ―오십오분 교통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교통량은 적으나 대기가 뿌옇습니다. 안개와 먼지가 뒤엉켜 가시거리가 짧으니 자동차 전조등을 밝게 켜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노량진……


   짧은 사이 도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부분 알아채지 못한 실수였으나 방송 베테랑 최경위만은 심상찮은 눈으로 도화를 주시했다.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  그리고 최경위가 나서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교통방송 때 늘 하는 말, 도화가 신뢰하는 말, 과장도, 수사도, 왜곡도 없는 문장을 풀어냈다. 


   ―노량진역에서 노들역 방향 사이 승용차 추돌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사고 정리가 모두 끝난 상태라 양방향 모두 교통 상황 원활합니다. 


119p.
   더이상 고요할 리도, 거룩할 리도 없는, 유구한 축제 뒷날, 영원한 평일. 12월 26일이었다. 


<풍경의 쓸모>
149p.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때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150p.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어색한 듯 자명하게 서 있다. 정확히 어떤 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1970년대 때깔 혹은 낙관적 파랑을 등에 인 채. 코닥산 명도, 후지식 채도에 안겨 있다.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위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꼐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떄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156p.
 관광 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한국 날씨와 뉴스, 주가와 환율을 확인했다. 1월. 연이은 한파와 폭설 속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반면 차창 너무 여름은 느긋했다. 푸르고 풍요롭고 축축해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그런.


167p.
 ―엄마.
 ―응?
 ―저기 서봐. 
 어머니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사십오 도가량 몸을 틀었다. 풍경을 배경으로 가져본 적 없는 세대의 어색한 경직성이었다. 


173p,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세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183p.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가리는 손>
193p.
 태곳적 사람들도 저녁에 불을 피웠겠지. 춥거나, 허기지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을 때. 지금은 그중 어느 때일까? 


213p.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ㅡ바깥은 여름, 김애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