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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9. 22:18

 

Ep.4 거짓말

 
 하필이면 만우절이었다. 거짓말 같던 죽음도, 거짓말이 돼버린 고백도. 하필 그랬다. 누구 하나 거짓을 말한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누구 하나 속은 사람도 없었지만 거짓말에 속은 만우절의 바보보다 천 만 배는 더 처참한 만우절이었다. 
 
 때때로 현실은 거짓말보다 잔인하다.  
 
 

Ep.6 선물학개론

 
 대학 첫 여름방학이 다가올 무렵, 우리는 친해졌고 가까워졌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딱 그 만큼 미안함은 사소해졌고 고마움은 흐릿해졌으며, 엄마는 당연해졌다. 
 
 1994년 초여름의 일상은 그렇게 엄마를 잔인하고 깊게 할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관계는 익숙해지고 결국엔 당연해진다. 선물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를 새삼 다시 설레고 감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선물을 고르고 카드 문구를 고민하며 그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 어느새 그 사람은 내게 다시금 새삼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마음이란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고도 당연한 관계가 급기야 무뎌짐으로 퇴화돼버린다면 이젠 그 어떤 선물도 뒤늦은 노력도 의미없다.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베란다 귀퉁이에서 바짝 시들어버린 난초에게 때늦은 물과 거름은 소용없는 일이다. 
 
 관계가 시들기 전에, 서로가 무뎌지기 전에 선물해야 한다. 마음을 전해야 한다. 
 
 알고 받는 선물이란 재미없다. 모름지기 선물은 서프라이즈가 생명인 법이다. 기막힌 타이밍에 거짓말처럼 날아든 그 선물은 그래서 더욱 기적같은 감동이었다. 물론 보내는 이의 이름도 주소도 없었지만 그 선물을 누가 보내주었는지 우린 알 것만 같았다. 
 
 

Ep.16 사랑, 두려움

 
 청춘이 힘겨운 건 모르는 것들 투성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뭘로 채워야 할지 모를 빈칸들이 눈앞에 수두룩한 시험기간 같다고나 할까. 돌아보면 그 빈칸들의 정답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누군가 정답지를 들고 채점할 것만 같은 공포, 그리고 남들과 다르다고 쓰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내 20대는 늘 숨막히는 시험기간이었다.
 
 난 이제 오래도록 비워뒀던 빈칸에 답을 채워야만 했다.
 
 
 

 

Ep.17 사랑, 두려움Ⅱ

 
 1997년 스물셋.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의 이 두근거림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 사랑이, 내게 처음으로 다가선 이성을 향한 작은 호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남들이 말하는 그, 그 사랑이란 것 때문인지. 잃을게 없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사랑이 깊어 갈수록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갈수록 두려움도 커져만 간다. 
 
 사랑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사랑으로 인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다시 사랑이다. 
 
 

Ep.20 끝의 시작

 
 아빠가 없어도 엄마가 없어도 난 야구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고 뜨거웠다. 외로움 따윈 치열하지 못한 삶에나 찾아드는 한가로운 감정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스무살, 어느날 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기 시작한 그 날부터 그 빈자리가 허전해 가슴 한 켠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그게 외로움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참 많이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외로워서 그리웠고 그리워서 더 외로웠다.   

   끝날 때까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끝이 없는 게임이라면 스스로 끝을 결정해야만 한다. 
 
 일만 시간의 가슴앓이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제 가슴을 내려놓아야 한다. 끝을 시작해야만 한다. 
 
 

Ep.21 90년대에게

 
2002년 6월 19일 신촌하숙이 문을 닫았다.
그렇게 우린 신촌하숙의 처음이자 마지막 하숙생이 되었다. 
 
특별할 것도 없던 내 스무살에 천만이 넘는 서울 특별시에서 기적같이 만난 특별한 인연들. 촌놈들의 청춘은 북적대고 시끄럽게, 그리하여 기어코 특별하게 만들어준 그곳, 우린 신촌하숙에서 아주 특별한 시간들을 함께했다. 
 
울고, 웃고, 만나고, 헤어지고, 가슴 아프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추억과 다른 만남과 다른 사랑을 했지만 우린 같은 시간 속 같은 공간을 기적처럼 함께했다.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지만
이래 봬도 우린 대한민국 최초의 신인류, X세대였고

폭풍 잔소리를 쏟아내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지만
한 땐 오빠들에게 목숨을 걸었던 피끓는 청춘이었으며,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
 
70년대의 음악에, 80년대의 영화에 촌스럽다던 비웃음을 던졌던 나를 반성한다. 그 음악들이, 영화들이 그저 음악과 영화가 아닌 당신들의 청춘이었고 시절이었음을 이제 더이상 어리지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2013년 12월 28일. 이제 나흘 뒤 우린 마흔이 된다. 
대한민국 모든 마흔살 청춘들에게 그리고 90년대를 지나 쉽지 않은 시절들을 버텨 오늘까지 잘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바친다.  우린 참 멋진 시절을 살아냈음을,
빛나는 청춘에 반짝였음을,
미련한 사랑에 뜨거웠음을, 기억하느냐고. 
그렇게 우리 왕년에 잘 나갔었노라고. 
그러니 어쩜 힘겨울지도 모를 또다른 시절을 촌스롭도록 뜨겁게 사랑해 보자고 말이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 90년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