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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19. 17:07

면접을 보고 나온 뒤 지원사업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지원사업 신청이라는 게 되면 물론 좋지만 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자존감 깎이고, 어마어마하게 에너지를 뺏기는 일이다. 그러나 별수 있나. 전세금까지 빼서 그 돈으로 영화를 찍고 세계 영화제를 휩쓸고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도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최소한 내 삶을 영위하면서 영화를 찍고 싶었다. 심사위원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영화를 꼭 완성하겠다고 다짐했다.

"극장이라는 곳이 참 재미있지. 결국 우리는 스크린에 쏘아진 빛을 보기 위해 일부러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이번에는 잘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 인생에 계획대로 되는 게 뭐가 있나?"
고태경은 애써 씩씩한 연기를 하듯 톤을 높여 말했다.
"그래도 물론 영화는 계획대로 진행돼야 해. 모든 영화는 완성돼야 해.

〈GV 빌런 고태경》의 영화제 반응은 여느 흥행 영화 부럽지 않게 뜨거웠다. 영화제 기간 내내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거의 모든 상영작을 감상한 고태경은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이전까지 2000년에 머물러 있던 고태경의 필모그래피는 2019년에 〈GV 빌런 고태경>의 '주연-본인 역'으로 업데이트됐다.

조 감독, 영화를 만들자! 극장에서 다시 영화를 상영하자.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지.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단팥죽은 얼마든지 사줄게.
추신. 자네에게 내 0.5초를 선물할게.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극장으로, 그 어두컴컴한 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신기루를 좇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고, 완성된 영화가 빛이 되어 먼지를 뚫고 흰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환상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가 보낸 세월이 빛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박원호 교수님이 말했던 선택의 프로.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